
은퇴를 앞둔 사람들은 대부분 "자녀 교육비가 끝나면 돈 쓸 일이 없겠지", "노후엔 검소하게 살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은퇴 이후 지출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은퇴 전 예상한 지출보다 실제 지출이 훨씬 크다는 점에서 놀라게 된다. 이는 단순한 오산이 아니다. 은퇴 후의 지출은 생활 구조의 변화, 건강 문제, 여가 활동 증가 등으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변동성이 크기 때문이다.
첫째, 의료비는 대부분의 은퇴자들이 예상보다 크게 지출하는 항목이다. 나이가 들수록 각종 검사, 치료, 약물 복용, 장기적인 건강관리에 대한 비용은 꾸준히 증가한다.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비급여 항목이나 간병비는 적지 않다. 둘째, 여가 및 사회활동 비용도 예상보다 많다. 은퇴 이후에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 취미, 동호회, 지인들과의 모임 등이 늘어나는데, 이 또한 생활비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셋째, 부모님이나 자녀, 손주를 위한 예상치 못한 지출도 발생하기 쉽다. 결국 은퇴 후 삶이 여유롭고 의미 있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덜 쓰는’ 전략보다는 현실적인 소비 패턴을 기반으로 한 지출 설계가 필요하다.
은퇴하면 모든 고정지출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주거비, 관리비, 통신비, 자동차 유지비, 보험료 등은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빠져나가는 고정비용이다. 특히 자가가 아닌 경우에는 임대료 또는 주택연금 이외 주거유지 비용이 부담이 될 수 있고, 자가라 하더라도 유지보수나 세금 문제 등으로 계속해서 지출이 발생한다.
또한 자녀가 완전히 독립하지 않은 경우, 부모로서의 지원이 은퇴 후에도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학 등록금, 결혼자금, 심지어 손주 양육비까지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예상치 못한 가족 관련 지출은 계획된 은퇴 자산을 빠르게 소진하게 만들 수 있는 변수다. 여기에 더해, 고령층일수록 가족 행사나 경조사 지출도 많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자산 설계에 있어 미묘한 지출 누수를 만든다.
즉, 은퇴 이후에는 수입이 줄어드는 반면 지출은 줄어들지 않거나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히 "내 연금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지출 항목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예산을 수립하며, 유사시 대응할 수 있는 자금 구조를 사전에 설계해야 한다.
많은 재무 전문가들은 은퇴 이후에도 일정 수준의 자산 유동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상치 못한 지출은 예산을 넘기고, 그때마다 자산을 깰 수밖에 없는 구조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퇴 후 자산은 ‘얼마나 있는가’보다도, 필요할 때 쓸 수 있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 중기, 장기 자산을 구분하고, 필요 시 유연하게 전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매달 고정 생활비는 연금으로 충당하고, 여가비용이나 건강비용은 적립식 보험이나 현금성 자산으로 확보해두며, 예기치 못한 상황에는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비상자금이 따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산을 모두 장기상품에 넣는 것보다는, 일부는 유동성이 높은 자산으로 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은퇴 이후의 삶은 긴 마라톤이다. 예상과 다른 지출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사전에 충분히 시뮬레이션하고, 플랜 B와 C까지 마련해 두는 것이 결국 안정된 노후를 만든다. 단순히 숫자를 맞춰놓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자산 설계와 소득 전략이 은퇴자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